2025. 10. 29. 06:00ㆍ여운이 머무는 자리(에세이)
발자취 | 감성 에세이
끊었던 관계가 다시 이어졌지만, 변한 건 세월뿐이었다.
듣지 않는 사람과 듣는 척하는 나, 그 사이에 남은 온도에 대한 기록.
다시 마주한 얼굴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끊었던 내가, 오히려 먼저 연락을 했다.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그를 마주하기 전까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앉으니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형식적인 미소를 건넸다. 그 순간 잠시 예전의 온기가 스쳤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여전히 자기 이야기로 시작했다.
회사 일, 주변 사람들, 새로 시작한 취미, 그리고 본인이 얼마나 바쁜지.
그의 말은 끊길 줄 몰랐고, 내 대답은 늘 ‘그렇구나’로 끝났다.
한때 그 수다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활달한 에너지가 내 하루를 덮던 시절.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열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그래, 여전하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했던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나였다는 걸 이제야 안다.
말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멀어졌다.
눈앞의 사람은 그대로인데, 대화는 더 이상 나를 포함하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테이블을 튕기고 사라질 때마다, 내 안의 추억들도 조용히 흩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기도 하지만, 관계는 반드시 변한다는 걸.
변하지 않은 대화, 변해버린 자리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메뉴판을 들고 “돼지국밥 어때?”라며 웃었다.
예전엔 그걸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고기는 다 건져내고 국물과 밥만 말아먹던 그.
그 습관조차 그대로였다.
시간이 지나도, 입맛도, 방식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
국물보다 진한 건 그의 자기 확신이었고,
내가 삼킨 건 음식이 아니라 피로였다.
식사를 마친 뒤, 그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잠깐 마트 들르자. 필요한 게 좀 있어서.”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갔다.
그는 장바구니를 밀며 이것저것 담았다.
세제, 과일, 간식, 그리고 또 다른 사소한 것들.
그의 말투는 익숙했고, 행동은 너무 당연했다.
계산대 앞에 섰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지갑을 꺼냈다.

그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세월이 흘렀는데, 그는 여전히 내 돈으로 쇼핑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빛엔 미안함보다 익숙함이 있었다.
그 익숙함이, 나를 다시 낯설게 만들었다.
쇼핑을 마치고 나서 그는 내게 말했다.
“집까지 태워줄게. 어차피 가는 길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은 묘하게 조용했다.
라디오 소리만 낮게 흘렀고,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내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짧게 말했다.
“오늘 봐서 반가웠어.”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떠났다.
“이별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서로의 뒷모습으로 완성된다.”
그 차의 바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사라졌다.
그제야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아쉬움과 후회가 아니라, 오래 묶여 있던 무언가가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그 안에 묘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마도 익숙함과 해방감의 중간쯤 되는 향기였다.
나는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오늘의 대화가, 표정이, 계산대 앞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예전의 나는 그 사람의 말속에서 나를 찾으려 했다.
이제는 안다.
그의 세계에 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같다.
“사람을 완전히 잊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생각나는 빈도를 줄이는 일일 뿐이다.”
상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눈가의 그림자가 예전보다 깊어졌다.
하지만 그건 슬픔이 아니라, 오래된 관계를 정리한 얼굴이었다.
그 사람을 잊은 줄 알았다.
아니, 그와의 대화를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깨달았다.
사람은 완전히 잊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거다.
기억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색이 바랜다.
그리고 바랜 색은 오히려 부드럽다.
그의 말투, 웃음, 손짓 모두 바랜 채 남아 있었다.
그건 이제 상처가 아니라, 오래된 문장처럼 읽히는 추억이었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변했다.
그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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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마디
“다시 만난다고 해서 다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때로는 한 문장으로도, 사람은 멀어진다.”
면책 안내
본 글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기반한 감성 에세이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상황과의 직접적 연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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